파조역사14.제안공파(齊安公派)제안공파 자료
제안공파 자료

<파조소개>

공(公)의 휘(諱)는 효상(孝常)이고 1430년(세종12년) 3월 13일에 남원(南原)에서 태어나니 자(字)는 가구(可久)로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 휘(諱) 렴(廉)의 손자이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휘(諱) 지년(知年)의 둘째 아들로 총명(聰明)하고 민첩하여 돈박(敦樸)하고 준위(俊偉)한 자품과 박학(博學)한 학문으로 문사(文詞)가 높아 1451년(문종1년) 생원에 올랐고 1454년(단종2년)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출사(出仕)하였다.

1455년(세조1년)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훈(策勳)되었고 세자시강원사경(世子侍講院司經) 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누진(累進)하였으며 1459년(세종14년)에 한관독서(閑官讀書) 28인에 선입(選入)되었고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이조좌랑(吏曹佐郞) 지제교(知製敎)에 겸예문관봉교(兼藝文館奉敎)가 되었고 1462년(세조7년)에 내외간상(內外艱裳)을 당하여 정직되었다가 종제후(終制後)에 이조좌랑(吏曹佐郞)에 복귀하였고 곧 칠학문(七學門)의 천문학(天文學)에 발탁되어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겸예문관응교(兼藝文館應敎)에 승진(升進)하였다.

1466년(세조11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라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승진되었고 1468년(예종1년)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겸경연시강관(兼經筵侍講官)으로 옮기었고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3등에 책훈됨과 동시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계림군(鷄林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1469년(예종1년)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기었고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1470년(성종1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었다.

다음해에 순충명양좌리공신(純忠明亮佐理功臣) 3등에 책훈되었고 1472년(성종3년)에 승진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74년(성종5년)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기었고 1476년(성종7년)에 진하사(進賀使)로 황태자책봉(皇太子策封)을 하례하였고 1477년(성종8년)에 겸의금부사(兼義禁府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1479년(성종10년)에 계림군(鷄林君)으로 복봉되었고 1481년(성종12년) 1월 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0세로 시호(諡號)는 제안(齊安)이며 42세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는데 신환(身患)으로 상태(上台) 청송에 오르지 못함을 애석히 여겼다. 묘소는 교하군 아동면 교동(喬洞)에서 파주시 금촌읍 금릉리(金陵里) 좌(坐)에 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와 쌍분(雙墳)이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고양기씨(高陽奇氏)는 휘(諱) 채(菜)의 딸로 2남 2녀를 두니 장남은 별제공(別提公) 휘(諱) 홍선(洪先)이고 차남은 교위(校尉) 휘(諱) 창선(昌先)이며 딸은 교리(校理) 최영호(崔永灝)와 생원(生員) 구원지(具元之)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