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역사11.팔송공파(八松公派)팔송공파 자료
팔송공파 자료

<파조소개>

공(公)의 휘(諱)는 홍덕(弘德)이고 1383년(우왕9년)에 본제(本第)에서 태어나니 자(字)는 남포(南逋)이고 호(號)는 팔송(八松)으로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휘(諱) 종보(宗輔)의 손자이고 문하부정언(門下府正言) 휘(諱) 인량(仁良)의 아들로 덕성(德性)을 지녀 침묵하고 정직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았으며 등과(登科)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1454년(단종2년)에 사신으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그 이듬해인 1455년(단종3년)에 돌아오니 세조(世祖)가 이미 왕위를 물려받았고 단종(端宗)은 영월(寧越)에 물러나 있었다.

공(公)은 곧 유궁(幽宮)에 모든 사실을 상주하고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참화(慘禍)를 당한 육신(六臣)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 살아서 남아있는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며 순절하려고 함에 구십 노모(老母)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노모를 모시고 ​종질(從姪) 노송정공(老松亭公)과 함께 남하(南下)하여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밑에 은거하며 소나무 여덟그루를 심고 상하단(上下壇)을 만들어 나무마다에 육신과 매월당(梅月堂:김시습선생) 그리고 자신을 포함하여 팔충(八忠)의 뜻을 나타냈고 단종휘일(端宗諱日)에 상단(上壇)에 육신의 제삿날에는 하단(下壇)에 분향곡배(焚香哭拜)하였다.

공(公)은 ​년(세조6년)에 돌아가시니 당시에 평장(平葬)한 관계로 실묘되었으나 1967년에 지금의 묘소를 심묘(尋墓)하였고 그동안 남원유림(南原儒林)들이 신단(神壇)을 설치해 제사를 지내왔으며 지난 2003년 4월에 공주(公州)의 숙모전(肅慕殿) 동무(東廡)의 48위차에 추배되었다.